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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한 움큼한 웅큼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보통 무엇인가를 쥘 때를 표현하는 말로 움큼과 웅큼을 헷갈리곤 하는데요 과연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올바른 표준어일까요?

 

 

 

 

 

 

정답은 한 움큼입니다.

 

 

‘움큼’은 ‘움키다’라는 기본형의 명사형태로써 "손으로 한 줌 움켜쥘 만한 분량을 세는 단위를 뜻하는 의존명사"입니다.

 


그렇다면 한 움큼을 분석해본다면, 관형사 ‘한’과 의존명사 ‘움큼’이 결합한 형태로 ‘한 움큼’이라고 사용하는 것이 올바르며, 관형사와 의존명사 사이는 띄어 적는 것이 올바른 표기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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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조직에서나 행사를 치른 뒤에는 간단한 술자리로 그간의 고생을 위로하거나 하죠?

그럴 때 '뒤풀이' 와 '뒷풀이'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이 올바른 표현일까요?

 

 

 

 

뒤풀이

 

 - 어떤 일이나 모임을 끝낸 뒤에 서로 모여 여흥(餘興)을 즐기는 일.

‘뒤풀이’는 순우리말 ‘뒤’와 ‘풀이’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합성어로 한글맞춤법 제30항 '사이시옷' 규정에 따라 된소리(ㄲ,ㄸ,ㅃ,ㅆ,ㅉ)나 거센소리(ㅊ,ㅋ,ㅌ,ㅍ) 앞에는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즉 발음은 'ㅅ'이 들어간 뒷이 적절해보이지만 표기상으로는 '뒷풀이'가 아닌 '뒤풀이'가 되어야 합니다.

 

 

뒤풀이와 비슷한 유형의 예를 살펴보면..

 

 

ex) 뒤뜰(뒷뜰X), 뒤꿈치(뒷꿈치X), 뒤쪽(뒷쪽X), 위쪽(윗쪽X), 나루터(나룻터X), 코털(콧털X)

 

 

 

 참고로 간략하게나마 사이시옷을 적지 않는 경우임에도, 한자어 결합의 경우에는 사이시옷을 적는 예외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6가지가 있습니다.

 

 -  곳간(庫間), 셋방(貰房), 숫자(數字), 찻간(車間), 툇간(退間), 횟수(回數)

 

 

 두번째 사이시옷의 중요한 특징은 외래어와 순우리말의 결합에는 사이시옷을 적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피자집(피잣집X), 핑크빛(X) cf : 우윳빛(O)

 

 

 

 

네, 이상으로 뒤풀이와 뒷풀이 중에서 어떤 것이 올바른 표현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참고 : 국립국어원,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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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의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에서는 다른 사람의 유쾌하지 못하게 해결하는 의미로 보통 사용되는 뒤치다꺼리 혹은 뒤치닥거리라는 표현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과연 뒤치다꺼리뒤치닥거리. 어떤 것이 올바른 표현일까요?

 

예를 들어 어린 동생이 있는 분들의 경우라면, 동생의 뒤치다꺼리 / 뒤치닥거리로 정신이 없다 라는 문장에서 과연 어떤 것이 올바른 표현일까요?

 

 

 

 

 

정답은 동생의 뒤치다꺼리로 정신이 없다가 올바릅니다.

 

 

뒤치다꺼리 [발음 : 뒤ː치다꺼리]

  

 

1. 뒤에서 일을 보살펴서 도와주는 일.

예)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뒤치다꺼리에 아침은 늘 바쁘다.(O)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뒤치닥거리에 아침은 늘 바쁘다.(X)

 

     자식이 많은 문제로 자식들의 학비 뒤치다꺼리도 힘들다.(O)

     자식이 많은 문제로 자식들의 학비 뒤치닥거리도 힘들다.(X)

 

    언제까지 어린 동생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까?(O)

   언제까지 어린 동생의 뒤치닥거리를 해야 할까?(X)

 

 

이러한 올바른 표현인 뒤치다꺼리와는 반대로 뒤치닥거리는 어떤 의미일까요?

 

 

뒤치닥거리  

 1.‘뒤치다꺼리’의 잘못된 말.

 2. ‘뒤치다꺼리’의 북한어.

 

네 결국 뒤치다꺼리가 올바른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억해보는 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의 싫은 일을 돌보는 것을 뒤치다꺼리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뒤치다"꺼리" ... 꺼리는 일을 한다.. 뒤치다꺼리

 

오늘의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 뒤치다꺼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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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제 점점 여름으로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여름이면 장마철도 다가오기 때문에 우산을 잘 가지고 다녀야 할텐데요.

 

여기서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 식당이나 가게에 들른 후 종종 사라져버리곤 하는 우산이 문제가 되곤 하는데,

과연 우산은 잊어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잃어버린 것일까요?

 

 

 

 

 

방금과 같은 상황에서의 정답은? 우산을 잃어버린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사실 잊어버리다와 잃어버리다는 무조건 하나가 틀리고 맞는 표현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상황에 따라 모두 각각 올바른 표현입니다.

 

먼저 잃어버리다에 대해서 알아보면,

 

 

 

잃어버리다 ([발음 : 이러버리다]

 

1. 가졌던 물건이 자신도 모르게 없어져 그것을 아주 갖지 아니하게 되다

2.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아주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되다.

3. 몸의 일부분이 잘려 나가거나 본래의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다.

4. 의식이나 감정 따위가 아주 사라지다.

5. 어떤 대상이 본디 지녔던 모습이나 상태를 아주 유지하지 못하게 되다.

6. 길을 아예 못 찾거나 방향을 분간 못 하게 되다.

7. 같이 있거나 같이 길을 가던 사람을 놓쳐 헤어지게 되다.

8. 의미나 의의가 아주 없어지다.

 

예) 거리에서 돈을 잃어버리다 (O)

      거리에서 돈을 잊어버리다 (X)

  

      거짓말 때문에 친구를 잃어버리다(O)

      거짓말 때문에 친구를 잊어버리다(X)

 

      용기를 잃어버리다 (O)

      용기를 잊어버리다 (X)

   

      명예를 잃어버리다(O)

      명예를 잊어버리다(X)

 

      목적지를 잃어버리다(O)

      목적지를 잊어버리다(X)

 

     우산을 잃어버리다(O)

     우산을 잊어버리다(X)

 

    살아야 할 의미를 잃어버리다(O)

    살아야 할 의미를 잊어버리다(X)

 

 

 

잊어버리다 (동사) ([발음 : 이저버리다]

 

1. 한번 알았던 것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거나 전혀 기억하여 내지 못하다.

2. 기억해야 할 것을 한순간 전혀 생각하여 내지 못하다.

3. 일하거나 살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어려움이나 고통, 또는 좋지 아니한 지난 일을 전혀 마음속에 두거나 신경 쓰지 아니하다.

4. 본분이나 은혜 따위를 마음에 새겨 두지 아니하고 아주 저버리다.

5. 어떤 일에 열중한 나머지 잠이나 끼니 따위를 전혀 취하지 아니하다.

 

예문)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 잊어버렸다(O)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 잊어버렸다(X) 

 

        마음의 상처를 다 잊어버렸다(O)

        마음의 상처를 다 잃어버렸다(X)

 

        자기 본분을 잊어버리다(O)

        자기 본분을 잃어버리다(X)

 

        먹는것도 잊어버리고 공부에만 몰두하였다(O)

        먹는것도 잃어버리고 공부에만 몰두하였다(X)

 

쉽게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억이라는 추상성과 물건이라는 구체성에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잊어버리다는 '기억이나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의미이지만, 잃어버리다는 '물건 또는 행동 등이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의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 잃어버리다와 잊어버리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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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 콘텐츠로 희한하다와 희안하다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보통 놀랍거나 신기한 일을 두고 참 희한하다~ or 희안하다~ 라고 표현할텐데, 과연 표기에 있어서는 어떤 것이 올바른 표기법일까요?

 

 

 

 

 

 

 

 

정답은 바로 "희한하다"가 올바른 우리 표준어입니다.

 

희한하다 :: --[발음 : 히한하다]

 

 - 매우 드물거나 신기하다.

* 희한(稀罕)하다의 한자를 살펴보면, 드물 '희'(稀)에 드물 '한' (罕)을 사용합니다. 즉 이는 "드물고 또 드물다"라는 뜻을 의미합니다.

 

 예문 ) 희한한 일(O)

           희안한 일(X)

   

           처음 알게 된 희한한 물건(O)

           처음 알게 된 희안한 물건(X)

 

           희한한 소문이 나돌다(O)

           희안한 소문이 나돌다(X)

 

 

 

이렇게 외워보는 것은 어떨까요?

 

흔히 어이없거나, 신기하면 놀랍기도 하면서 허탈(?)한 웃음을 짓기도 하는데, ㅎㅎ... 거참 희한하네...

 

즉, "희""한"의 "ㅎㅎ".. 희안이 아니라 희한이라고 외울 수 있겠습니다.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 '희한하다'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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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려시대 불교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1. 고려 초기 불교

 

 1) 교종 & 선종의 공존

   - 고려 초기 화엄사상 정비 (균여)

   - 보살의 실천행 강조한 균여의 화엄종이 성행

   - 이후 선종에 대해 관심도가 높아짐.

      cf) 통일신라에 이미 선종에 대해 왕실에서도 관심도가 높아지던 상황이었기에 고려시대에도 선종은 이미 보급되어 있었습니다.

 

 2) 교종 정립

   - 개경에 흥왕사, 현화사와 같은 큰 사원이 세워져 교종 번성!

 

 3) 광종의 교단 통합

   - 광종은 균여의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재편합니다.

   - 광종은 제관과 의통을 중국에 보내 천태학을 보급합니다.

   - 하지만 광종 사후 법안종과 천태종의 움직임은 쇠토하고, 교선의 대립은 지속됨.

 

 

2. 고려 중기의 불교

 

 1) 교종 번창

   - 현종 대 거란과의 전쟁 동안 대장경 조판으로 교종 번성

   - 불교 교리 및 불경 정리가 이뤄짐.

   - 교종의 중심 종파 2개 활성화 (화엄종 vs 법상종)

   - 화엄종 vs 법상종 비교표

 

  종파

 중심 사찰 

 위치 

 특징 

 공통점 

  화엄종

흥왕사

  개경

 화엄사상 

교종

  법상종

 현화사

 유식사상

 

 2)대각국사 의천의 교단통합

   - 원효의 화쟁사상을 중시

   - 흥왕사를 본사로 삼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각 교종 종파를 통합시도(But 의천 사후, 교종 다시 분열)

   - 선종을 통합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청사 창건

   - 교관겸수 & 내외겸전을 중심으로 이론의 연마와 실천 강조

 

 

3. 무신정권기의 고려 불교

 

  1) 선종의 발달

    - 무신정권은 귀족적이던 교종을 탄압하고, 선종을 후원함.

    - 이 때 조계종이 발전함.

    - 불교 본연의 자세 확립을 강조하는 선종의 새로운 신앙 결사운동.

 

  2) 수선사 결사운동

    - 조계종 승려인 보조국사 지눌은 순천 송광사에서 개혁운동 전개

    - 예불 독경과 선수행, 노동을 강조

    - 정혜쌍수, 돈오점수 강조

    - 무신정권의 후원뿐만 아니라 지방민의 호응도 있었음.

    - 선종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려 한 의의 있음.

    - 이후 수선사 결사운동의 발전 : 혜심의 유불일치설로 발전

       -> 이는 결국 성리학 수용을 가능하게 하는 사상적 토대가 됨.

 

  3) 백련결사운동

    - 천태종 승려 요세가 강진 만덕사(백련사)에서 백련결사 주장

    - 요세는 예참과 아미타불 염송으로 서방정토로 왕생한다는 정토신앙까지 수용 (참고 : 정토신앙은 원효스님도 강조)

    - 보현도량의 개설

    - 수선사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선도함

 

  결사

 종파 

 인물 

 내용

 특징 

 연대 

 중심 사찰

  수선사

 조계종

 지눌

 예불독경·선 수행·노동

 성리학 수용

 사상적 토대 마련

 1204

 송광사(순천)

  백련사

 천태종

요세

참회의 강조(법화신앙)

 백성들의 신앙적

 욕구 고려

 1208

 만덕사(강진)

 

 

4. 고려 말기의 불교

 

 1) 고려 말의 불교는  간섭, 라마 불교의 전래, 사원 경제의 거대화 등으로 개혁 운동이 퇴색하고, 폐단을 드러내게 됨.

 2) 권문세족의 불교 장악

   - 사원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업과 상업에도 관여하는 등 부패가 극심함

​ 3) 보우

   - 교단 통합 정리 운동

   - 임제종의 유입

   - 보우는 원나라에서 임제종을 들여와 전파시킴

   - 그 결과 전통 불교는 끊어지고 불교계의 주류로 임제종이 떠오름

 

 

 

이것으로 고려시대의 문화, 불교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참고 : 신영식 해동한국사, 두산백과사전,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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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려시대의 역사서에 대하여 알아보려 합니다.

 

고려시대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에서처럼 초기 고려시대의 역사서에서도 그 의식이 드러납니다. 즉 자주적인 기상이 드러납니다.

 

 

 1. 고려 초기의 역사서

   1) 고려왕조실록 - 건국초기부터 편찬됨. 하지만 거란 침입으로 소실

   2) 7대실록 - 태조~목종까지. 현종 대 편찬시작되어 덕종 대 완성.

    -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소실

   3) 가락국기 - 문종 대 김양감이 지음. 금관가야의 역사입니다. 대가야 아님. 현존 X

   4) 속편년통재 : 예종 대 홍관이 지음. 편년체 사서. 현존 X

 

 

하지만 고려 중기에 이르면서 문벌귀족 세력이 강해지면서 점차 자연스레 보수화 되는 경향이 드러나게 됩니다.

 

 

 2. 고려 중기의 역사서

   1) 삼국사기(인종 대 김부식)

     - 김부식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

     - 고려 초에 저술된 자주적 성격의 "구삼국사"를 바탕으로 함

     - '구삼국사'의 역사관은 자주적이었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적 합리주의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저술함

     - 김부식은 신라 계승 의식을 드러냄 (백제는 속임수가 많은 국가로, 고구려는 호전적인 국가로 비판함)

     - 역사적 사실과 사관의 주관이 담긴 사론을 구분

     - 내용적 구성 : 본기, 열전, 지, 연표로 나누고, 고구려-백제-신라를 본기에 담음 

     - 삼국을 아'(我)'로 표현해서 민족 의식을 명확히 했음

 

   2) 편년통록 (의종 대 김관의)

     - 송나라 왕실 계보를 담은 편년통록을 참고하여 저술

  

 

 3. 고려 후기 : 무신기의 역사서(12~13세기)

   1)동명왕편 (명종 대 이규보 - 주의!!: 이의민 집권기에 저술)

     - 이의민 집권기에 이규보가 편찬하였고, '동국이상국집'에 수록

        주된 함정은 이규보는 최충헌 대 주로 활동했지만 동명왕편은 이의민 집권기에 저술되었다는 걸 기억하세요.

     - 동명왕편은 민간 전승으로 전해진 고구려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오언시로 구성된 영웅 서사시

     - 고구려 계승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 전통을 노래

 

  2)해동고승전 (고종 대 각훈)

     - 무신정권기 "교종" 승려인 "각훈"이 왕명으로 편찬

     -  삼국시대 승려 30여 명의 전기 수록, 현재 유통편 2권만 현존.

     - 교종(화엄종)이 선종 유행에 대한 일종의 대응.

     - 중국 불교와 대등한 입장에서 서술됨.

 

  3)삼국유사 (몽골간섭기 충렬왕 대 일연)

     - "선종" 승려인 "일연"이 저술

     - 단군의 건국 이야기 수록

     - 단군의 후예가 부여-고구려-백제로 이어진다고 주장

     - 삼한과 신라를 중국 계통으로 파악!

     - 삼국사기가 불교와 신이사관적인 내용을 삭제한 데 대한 반응으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해 비판적임

     - 기사본말체

    

  4)제왕운기 (몽골간섭기 충렬왕 대 이승휴)

     - 칠언시와 오언시로 편찬한 역사시

     - 상권과 하권으로 구성됨. 상권은 중국역사, 하권은 우리나라역사

     - 삼국의 시조를 중국으로 보는 삼국유사와 달리, 삼국의 시조를 천손(단군의 후손)으로 파악함

     - 삼조선설을 처음으로 기록 (단군/기자/위만)

     - 문제점은 단순히 어람용으로 간행되어,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록은 반영되지 않았음

    

 

 

 

이상으로 고려시대 문화 중 역사서에 대한 서술을 마칩니다. 다음 콘텐츠에서는 고려시대의 불교에 대해 서술하겠습니다.

 

 

<참고 : 신영식 해동한국사, 두산 백과사전,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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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려시대의 문화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한번에 모든 것을 다 기록하기보다도 나눠서 중요사항에 대해 서술하려 합니다.

 

 

01. 고려시대 문화의 개요

 

 - 고려시대는 고려 성종 대 최승로의 활약 등으로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채택되었고, 동시에 불교는 저변이 확대되어 일반 민중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 이러한 불교 사상은 점차 심화될 수밖에 없었기에 교종과 선종 등 여러 종파가 등장하면서 동시에 교종과 선종의 통합운동이 추진됩니다.

 

 - 통일신라의 예술도 뛰어났지만,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으로써 인쇄술은 최초의 금속활자인쇄본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에서 그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02. 고려시대 문화에서의 핵심!

 

 -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최승로는 성종에게 시무28조를 제시하면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며, 유교 정치를 지향할 것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불교 자체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아니며, 단지 정치에 있어서 불교가 아닌 유교 정치 이념을 지향하자는 것입니다.

 

 -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이 안향을 통해 도입되는데, 안향은 몽고 간섭기의 충렬왕 대에 도입됩니다.

 

 - 고려시대의 주요 집권세력들은 크게 문벌귀족 - 무신 - 권문세족으로 이어지는데, 문벌귀족 사회를 거치면서 귀족 사회의 보수화, 폐쇄화가 이루어집니다.

 

 - 하지만 과거제도도 광종 대 쌍기의 건의 이후로 점차 정착되는 과정에서 관학보다도 사학이 융성하게 됩니다. 그 대표가 바로 최충의 9재 학당을 포함한 사학 12도의 융성이 그것입니다.

 

 - 농경문화에 있어서는 우경 등의 심경법이 일반화 됩니다. 참고로 우경은 지증왕 대 본격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밭농사는 2년 3작으로 지었으며, 남부 지방만을 중심으로 이앙법이 시행됩니다. (이앙법의 전국적 실시는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입니다.)

 

 - 불교 문화에 있어서 스님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요. 대각국사 의천은 교관겸수, 내외겸전 등 천태종을 창립합니다. 비교할 것은 보조국사 지눌은 정혜쌍수 등 조계종을 창립합니다. 이는 당시 무신정권으로부터 후원을 받습니다.

 

 

03. 고려시대 교육기관

 

 - 고려시대는 이전의 통일신라에 비해 교육을 강조하여, 많은 학교(=향교)를 세웠습니다.

 

 -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고려 성종 대 중앙에 국립대학으로 국자감(국학)과 지방에 향교를 설치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별도로 경학과 의학교육 역시 강조하여 지방의 12목에는 "박사"를 파견합니다.

 

 - 국자감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자면, 국자감은 신분별 입학기준이 있었습니다. 국자감은 유학부(=경학부) & 잡학부 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평민 역시 입학도 가능했지만, 잡학부에만 입학이 가능했습니다.

 

  ** 또한 기술학부(율,산,서학) 외 기술교육은 담당 기관에서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조선에서는 모든 교육기관을 해당 기관에서 담당했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 국자감의 교육기구 구분* 

 구분

 경사 6학

 입학 자격

 교육 내용

 유학부

 (경학부)

 국자학

 문·무관 3품 이상 관리 자손

 경전

 태학

 문·무관 5품 이상 관리 자손

 정치&역사

 사문학

 문·무관 7품 이상 관리 자손

 문학

 기술학부

 (잡학부)

 율학

 문·무관 8품 이상 관리 자손

 + 서민자제

 법률

 산학

 수학

 서학

 그림&서예

 

이러한 고려 초기의 교육제도는 중기에 이르자 사학이 융성하게 됩니다. 주로 이 때를 언제로 보는지에 대해서는 11세기 중엽 문종 대로 봅니다. 최충의 9재학당의 설립 이후로 보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그런 점이 없지 않지만, 사학 교육을 받은 학생이 좋은 성적으로 과거에 합격하자 국자감(=국립교육)은 위축되어버립니다.

 

 

역사는 흐른다고 하죠? 이 때도 똑같습니다. 관학을 진흥시키기 위해서 다양하게 여러 제도들이 정비됩니다.

 

 첫번째 숙종은, 관학을 강화하기위해 서적포(=서적간행기구)를 설치합니다.

 

 두번째 예종은, 국자감을 국학으로 개칭하고, 국학 내부에 7재라는 전문강좌를 설치합니다. (7재 : 강예재(=무예) 포함) 그리고 다양한 도서기구를 설치하는데 청연,보문,천장,임천각을 설치합니다. 마지막으로 관학이 운영되기 위한 일종의 기금, 양현고를 설치합니다.

 

 세번째 인종은, 앞서 예종의 7재를 6개 강좌로, 즉 경사6학 체제로 정비합니다. 이때 중요한 서적이 간행되는데 바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그것입니다.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작성됩니다.

 

 네번째 충렬왕은, 원간섭기에도 관학 진행에 힘씁니다. 양현고가 점차 부실해진 점을 보완하기 위해 섬학전을 설치하고, 성균관을 설치하며, 공자 사당인 문묘를 건립합니다. (참고로 최초로 문묘가 건립된 시기는 통일신라의 성덕왕 대 입니다.) 그리고 경사교수도감을 운영합니다.

 

 다섯번째 공민왕은, 성균관을 더 크게 부흥시켜 이제는 성균관에서 기술교육을 제외시키고 순수하게 유학 교육만을 전담시키도록 개편합니다.

 

 

 이렇게 많은 왕들이 관학을 진흥시키려 노력한 점을 알 수 있겠습니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고려시대 문화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과 교육제도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습니다. 이후 콘텐츠에서도 고려시대의 문화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참고 : 신영식 해동한국사, 네이버 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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