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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 서른두번째 시간입니다. 이번에는 어떤 표현으로 헷갈리는 우리말을 소개할지를 고민했는데요. 흔히 어떤 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여러분들은 돈이 두 배 이상많다는 의미로 사용하려할 때,
"돈이 갑절 많다" 라고 쓰나요? 아니면 "돈이 곱절 많다"라고 쓰나요?

 

 

갑절과 곱절 중에서 과연 2배를 뜻할 때는 어떤 것이 올바른 표현일지에 대해서 알아보려합니다.

 

 

먼저 위의 문장에서 어떤 것이 올바른 표현이었을까요? 정답을 공개하겠습니다.

 

 

 

 

 

 

 

 


네, 정답은 바로 "돈이 갑절 많다"라고 써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갑절과 곱절의 각 정의와 사용되는 예를 문장을 통해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갑절입니다.

 

 

갑절 [발음 : 갑쩔]
[명사]
[같은 말] 배9(倍)(1. 어떤 수나 양을 두 번 합한 만큼).

예문 : 1. 그의 몸무게는 나보다 갑절이나 무겁다.
       2. 이곳 집값은 다른 곳의 갑절이다.
       3. 연휴를 앞둔 토요일이라 서울을 빠져나가기가 갑절로 힘들다.

 

갑절의 의미는 앞선 예문에서처럼 2배를 의미할 때 사용된다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2배일 경우에는 '곱절'이 아니라 '갑절'이라고써야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곱절이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2배는 '갑절' 그러면 곱절은 어떨까요?

 

 


곱절 [발음 : 곱쩔]
[명사]

1. [같은 말] 배9(倍)(1. 어떤 수나 양을 두 번 합한 만큼).
예문 : 1. 생산량이 작년보다 곱절이나 늘었다.
       2. 그 상점은 도매보다 가격을 곱절로 비싸게 부른다.
       3. … 양반댁 아씨들이 한 번만 봤다 하면 황홀해서 탐내 마지않으니 부르는 게 값이었다. 곱절 장사는 손태복의 절제할 줄 모르는 성품에 기름을 붓듯이 욕심을 북돋았고 …… 출처 : 박완서, 미망
       4. … 철도국에서 토지를 수용할 때 일본인에게는 조선인보다 곱절을 넘게 후한 값을 쳐주기 때문이라는 실토까지 듣고 보니 의심할 건덕지가 없었다. 출처 : 박완서, 미망
       5. 꺽정이의 장광도는 비수 쇰직하게 적고 연천령의 환도는 장광도보다 곱절 넘어 커서 서로 어울리기만 하면 꺽정이가 훨씬 불리할 것 같았다. 출처 : 홍명희, 임꺽정 나 사장이 처음에 박하게 군건 잘한 일이었다. 처음에 후하다가 점점 박해졌더라면 아마 비용은 곱절로 더 들고도 공원들의 불평불만은 훨씬 더했을 것이다. 출처 : 박완서, 오만과 몽상
       6. 불안스러운 기색을 감추려는 듯 술잔을 비워 내는 속도도 선우 중위보다는 곱절이나 더 빨랐다. 그는 완전히 여유를 잃고 있었다. 출처 : 이청준, 이어도

2. (흔히 고유어 수 뒤에 쓰여) 일정한 수나 양이 그 수만큼 거듭됨을 이르는 말.
예문 : 1. 세 곱절
       2. 여러 곱절 
       3. 영농 방식을 이처럼 개선하면 소득이 몇 곱절 높아지게 됩니다.

 


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곱절이란 3배 이상의 경우를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즉 2배일 때는 '갑절', 3배 이상일 때는 '곱절'이 됩니다.

 

 

헷갈리지 않고 정확히 사용해야 수험 국어에서도 틀리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 서른 한번째에서는 '갑절'과 '곱절'의 차이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참고 : 네이버 국어사전, 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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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동안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에 대해서만 서술이 되었지만, 현대사에 대해서도 정리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현대사의 시대 순서대로 굵직한 사건들을 모아 연도에 따라 발생했던 사건들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20세기>

 

1901

 

1902 1차 영일동맹

 

1903

 

1904 한일의정서 : 토지사용에 자유롭게 일본이 사용

1904 한일협정서

1904 보안회.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철회

1904 대한매일신보 창간(~1910년 폐간)

 

1905 메가다(당시 재정고문)의 화폐정리사업

1905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 2차 영일동맹

1905 포츠머스조약

1905 을사늑약(2차 한일협약)

1905 경부선 완공 (기차순서 : 경인선-경부선-경의선-함흥선-전라선)

 

1906 경의선 완공

1906 서전서숙

 

1907 헤이그특사파견

1907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1907 신민회 조직

1907 국채보상운동

 

1908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1908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암살

 

1909 기유각서

1909 간도협약

1909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10.8 한일합방조약

1910 회사령실시

1910 13도 창의군 결성

1910 성명회조직

 

1911 신민회 해산(105인사건)

1911 조선교육령

1911 중광단 조직(->1919.5 대한정의단->1919.10 북로군정서군)

1911 권업회 조직

 

1912 토지조사사업

1912 조선태형령

1912 독립의군부 조직(~14)

 

1913 송죽회 결성

1913 광복단 결성(->1915 대한광복회)

1913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가 흥사단 조직

 

1914 대한광복군정부

1914 제1차 세계대전(~18)

 

1915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 체포

1915 조선국권회복단

1915 대동보국단

1915 대한광복회

1915 신한혁명당

 

1916

 

1917

 

1918 신한청년당

 

1919.3 3.1운동

1919.3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 조직

1919.4 한성정부,상해임정 조직

1919 강우규. 사이토총독 암살 시도

1919 의열단 조직

1919.5 대한정의단 조직(->1919.10 북로군정서군)

1919.9 상해임정 통합(1차. 대통령제)

 

1920 1차 산미증식계획 (~25)

1920 회사령철폐

1920 3개면 1개교 비율로 보통학교 증설

1920 조선,동아일보 창간

1920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간도참변

 

1921 자유시참변

1921 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1921.12 조선어연구회

 

1922 민립대학설립운동

1922 물산장려운동

1922 김익상 일본 육군대장 저격

 

1923 관세철폐

1923 관동대학살

1923 조선형평운동

1923 국민대표회의 개최

1923 천도교의 소년운동

1923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1924 경성제국대학 설립

 

1925 상해임정 2차.국무령제

1925 치안유지법

1925 총독부산하 조선사편수회

1925 조선공산당 조직

1925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발죄

1925 미쓰야협정

 

1926 정우회조직

1926.6 6.10 만세운동

1926.11 정우회선언

1926 조선농회령

1926 수양동우회 (~37)

1926 2차 산미증식계획(~34)

1926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

 

1927 상해임정 3차. 국무위원중심제

1927 신간회 조직 (~31)

1927 근우회 조직 (~31)

 

1928.12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1929 문자보급운동(~34)

1929.11 광주학생항일운동 (~1930.3)

1929. 원산총파업

 

1930 단천농민투쟁

 

1931 브나로드운동 (~34)

1931 만보산 사건

1931 만주사변

1931 한인애국단 조직

1931.12 조선어학회

 

1932 자작농지령 실시

1932 농촌진흥운동(~40)

1932 이봉창, 윤봉길 의거

1932 일본 만주국 세움

1932 조선혁명군+중국의용군의 흥경성,영릉가전투

 

1933 조선소작조정령

 

1934 진단학회 창립

 

1935

 

1936 신사참배

1936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1937 중일전쟁

1937 황국신민서사 제정

1937 연해주의 조선인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1938 국가 총동원법

1938 제3차조선교육령 (조선어폐지)

 

1939 창씨개명 공포

 

1940 상해임정 4차. 주석제(김구)

1940 조선,동아일보 폐간

1940 한국독립당 창당

1940 중경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1940 창씨개명 실시

 

1941 태평양전쟁

1941 상해임정 건국강령 발표

1941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

 

1942 조선어학회 사건

1942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에 합룬

1942 조선독립동맹 결성. 예하부대 조선의용군

 

1943 학도지원병제, 징병제

1943.11 카이로회담

 

1944 상해임정 5차. 정부주석제 주석/부주석(김구/김규식)

1944 건국동맹조직

 

1945.2 얄타회담

1945.7 포츠담회담

1945.8 해방,건국준비위원회

1945.10 이승만 귀국

1945.11 임정요인 귀국

1945.12 모스크바 3상회의

 

1946.3 1차 미소공동위

1946.6 6.3정읍발언

1946.7 좌우합작운동

1946.10 대구폭동

 

1947.5 2차 미소공동위

1947.7 여운형 암살 (좌우합작운동 결렬)

1947.9 미국이 한반도문제 UN상정

 

1948.3 UN.남한만의 선거 결의

1948.4 제주도 4.3사건,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회의

1948.5 5.10총선거

1948.7 7.17 헌법제정

1948.8 8.15 정부수립

1948.9 9.9 북한 정부수립, 반민특위법 제정

1948.10 여수,순천 10.19 사태

1948.12 소련군 철수

 

1949.6 국회 프락치사건, 김구피살, 미군철수, 농지개혁법 제정

1949.11 계엄법 제정공포

 

1950.1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

1950.6 6.25전쟁 발발

 

<참고 : 신영식 해동한국사, 네이버 백과사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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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1455-1468)

 

√. 조선 세조 관련

 - 중앙군으로서의 5위로 개편과 5위도총부 개편

 - 한명회 등 정난공신 중심으로 6조직계제 시행

 - 세조 대에는 태종 이후 배제됐던 외척과 종친 참여 허용

 - 통치질서 확립을 위한 ‘경국대전’ 편찬 시작(=완찬은 성종)

 - 경국대전 중 ‘형전’과 ‘호전’만이 세조 대 우선 반포됨

  

 

1. 왕권 강화

   ㄱ. 6조 직계제 실시, 왕권 강화  ㄴ. 집현전 폐지 : 경연제도 폐지

   ㄷ. 중앙 집권 강화 : 군현제 정비, 면리제, 오가 작통법

 

 2. 종친들을  중역에 등용 (세조)

 태종 이래 정치 참여가 제한되었던 종친들을 중역에 등용함

 

 

 3. 경국대전  편찬 시작 (세조)

  - 경국대전 완찬 (성종)

 

 호전(1460), 형전(1461)을 간행이 먼저 이루어집니다.

 

 

 4. 부국 강병 정책

 

        (세조)

 

 

 

 ㄱ. 군액 증가 정책 : 호적 관리, 호패법, 면리제, 오가작통법 등을 통해

 

  군액 증강을 도모하고, 보법을 실시하여 군역 대상자를 더욱 확대함

 

 ㄴ. 오위 체제 정비 : 중앙군으로서 5위 체제를 재정비

 

                               국왕 중심의 군권을 강화

 

 ㄷ. 진관 체제 실시 : 군현을 진관으로 편성한 방어 체제.

 

                                국방력이 강화.

 

 ㄹ. 토관제도 실시 : 사민 정책 강화 (북방 이주)

 

                              지방관을 파견하지 안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

 

 

 

 

 5. 직전법 실시

 

   (세조)

 

 ㄱ. 배경

 

 - 과전법 체제에서 전직 관리에게 지급되던 수신전, 휼양전 등의

 

  면세전이 증가하면서 수조지 부족 현상이 발생

 

 ㄴ. 경과

 

 - 현직 관리에 국한하여 과전의 수조권을 지급하는 제도

 

 - 산관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행

 

 - 세조는 이외에도 국가 재정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각종 둔전 설치

 

 - 공해전을 국용전으로 편입

 

 

 

 

 6. 이시애의 난과

 

   유향소 폐지 (세조)

 

 

 

 -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한 함흥부 유향소 별감

 

  '이시애'가 함경도 지방 차별에 반기를 들고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

 

  (1467)

 

 - 이 난을 계기로 함경도의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 함길도는 남북 2도

 

  로 분리되었으며, 전국의 유향소도 폐지

 

 - 이후 유향소는 성종 대에 다시 부활(1488)

 

 

 

 

 7. 불교의 진흥

 

 (세조)

 

  ㄱ. 간경도감 설치(1461)

 

 - 불교가 일시적으로 중흥하면서 많은 불경이 국역

 

 

 

  ㄴ. 원각사 건립(1464) : 원각사지 10층 석탑

 

 -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하여 국가적 민족 의식을 고양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국방력과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를 세우고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건립

√. 잡색군과 속오군 차이

 - 잡색군 : 조선초기, 농민을 제외한 전직관리, 서리, 교생,          잡학인, 신량역천인, 노비 등으로 구성

 - 속오군 : 임란 이후, 병력 부족 때문에 양반~노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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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태종의 뒤를 이은 왕으로써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 조선의 성군이라 할 수 있는 세종에서부터 문종과 단종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01. 세종

 

세종 대에는 정치, 문화, 과학 기술의 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세종 대에는 궁중 내부에 정책 연구 기관으로 정종 대에 설치된 집현전을 재정비하였고,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신숙주의 일화도 바로 이곳, 집현전에서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리고 유학 연구와 함께 경연에 참여하게 하여 국왕에게 정치 조언을 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세종 대 발전하게 된 기관이었던 집현전은 계유정난 이후에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폐지되게 됩니다. 세조는 태종과 마찬가지로 왕권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조 대 폐지되버린 집현전은 다시 부활되지는 않고, 성종 대 홍문관이 설치됨으로써 그 기능을 대신해나가게 됩니다.

 

 

##의정부 서사제 실시

 

세종은 그야말로 왕이라고 하여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기 보다도, 왕과 신하 사이의 권력관계에 있어서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6조에서 올라오는 여러 사안들을 의정부(영의정, 좌우정, 우의정)의 합의를 먼저 거치게한 후에 왕에게 보고하는 형태의 정치 체제인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정도전이 바라던 재상 중심의 정치가 다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해야할 점은 인사나 국방에 관한 일은 왕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가 이루려 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사안을 삼정승을 거쳐 일을 처리했다는 지문은 오답이니 유의해야 합니다.

 

 

 ## 관제 정비 ## 

 

세종 대 앞서 말한 신숙주라는 인물 이외에 기억나는 인물이 있나요? 그 인물로 장영실을 소개하려 합니다. 장영실은 본래 양반도아니고, 평민 신분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취재라는 제도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산관제도나 체아제도 등을 실시함으로써 보다 세부적인 관제의 정비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로 굳이 따진다면... 세종 대의 관제 정비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무에 따른 직급을 세분화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체아제도란? : 교대 복무, 근무기간에만 녹봉을 지급하는 제도

 

 

 ## 유교 이념의 확립 ## 

 

 세종은 그야말로 유교에서 말하는 도학의 정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윤리를 강조하여, '국조오례의'를 확립하고, 국가의 각종 행사들을 오례에 따라 거행합니다.  또한 윤대법을 실시하고, 불교도 7교로 인정되던 것을 선교 양종으로 통합하게 됩니다. 선교 양종으로 통합하게 되면서 전국에는 36개의 사원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궁중에 내불당-불경번역작업수행 은 남게 됩니다)

 

 

 ## 세종 대의 문화 ##

 

 세종대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한글이 창제되고 강우량을 측정해주는 측우기, 그리고 앙부일구(해시계)와 자격루(물시계) 등이 발명됩니다.

 (시험에서는 앙부일구를 물시계로 말함으로써 오답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또한 역법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원나라의 수시력과 명나라의 대통력을 참조한 최초의 한양을 기준으로한 "칠정산 내외편"이 간행됩니다.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도 박연이 아악과 당악, 그리고 향악을 정리합니다. 정간보도 세종 대 작성됩니다. (정간보를 성종으로 착각해선 안됩니다.)

 

 가장 중요한 경제 분야에 있어서 세종대왕의 과업은 바로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의 특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전분6등법 : 토지의 비옥도로써 6등전으로 나눠 면적 결정

 

 2) 연분9등법  : 한 해의 풍흉에 따라 1결당 최대 20두~4두 전세 징수

 

 

 

 02. 문종

 

 

세종의 뒤를 이은 왕은 문종입니다. 하지만 몸이 병약한 탓에 일찍 승하하고 맙니다. (1450~1452) 그 결과로 아직 어린 나이인 단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나이가 어리고 당시 세종의 아들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이 결국 단종을 폐위시키고 맙니다.

 

이렇듯 약해진 왕권으로 인해 재상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는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재상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03. 단종

 

 약해진 왕권에 더불어 결국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은 정난을 일으키게 되었고, 앞서 언급했던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제거하고 단종 역시 폐위하고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네, 오늘은 이렇게 세종, 문종, 단종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세조, 예종, 성종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 신영식 해동한국사, 네이버 백과사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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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에는 조선시대의 왕들의 업적 내지는 그 시대에 중요했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려 합니다!

 

 

이전에 조선시대는 태정태세문단세로 시작한다고 말씀드렸을텐데요.

그래서 이번에는 태정태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01. 태조 (1392-1398)

 


1. 정도전을 통한 조선의 제도 정립
 

 - 태조는 그야말로 정도전의 활약이 주목할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맡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가 마련했던 저서가 특히 수험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설명하려합니다.


  ## 저술## 
 1) 조선 경국전
 - 조선 개국의 기본 정책을 규정한 최초의 법전입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이것은 사찬법전이지, 조선이라는 나라의 법전은 아닙니다. 후에 나오겠지만 조선의 국법으로서의 법전은 "경국대전"입니다.
 
 2) 경제문감 
 - 조선시대의 정치 조직에 대한 초안에 대해서 서술한 책입니다.

 
 3) 경제육전

 - 위화도 회군(1988) 이래 10년간 행해져왔던 조례를 정리한 것으로써 이것은 관찬 법전입니다. (조준과 함께 작성했습니다)

 - 경제육전의 또다른 특징은 바로 '조종성헌'이라고 하는 최초의 성문 법전이라 하겠습니다.

 - 조선 초기에는 이두로 작성되어 방언육전 또는 이두원육전이라 불리기도 했고, 태종과 세종 대에 각각 속육전이 간행됩니다.
 
 4) 진법서

 - 명나라는 조선 태조의 父를 태조의 정적 이인임이라고 기록을 하는데요. 이를 표전문제라 합니다. 이것을 원인으로 외교적 마찰이 벌어지고 요동정벌을 추진하는 과정에 이르는데 정도전은 독자적으로 전술을 정리합니다. (참고: 이방원-후의 태종은 명과의 싸움을 반대했습니다.)


 5) 불씨잡변

 - 불씨잡변이란, 말그대로 불씨(=부처님)의 말이라는 뜻으로써,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배불의 정당성과 숭유억불에 대해 주장합니다.

 - 중요한 또다른 특징은 바로 불씨잡변은 정도전의 마지막 저술입니다.


 
 6) 고려국사

  - 고려국사는 조선왕조 개창의 정당성과 고려 왕조 멸망이 당연했음을 서술한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조선의 입장에서 쓰여진 상당히 주관적인 저서였기에 후에 세종 대에 고려사가 쓰여지게 됩니다.

 


 

 2. 성리학적 통치 이념 확립
 
  -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정도전을 포함한 여러 신진사대부들은 대거 중앙 정계에 참여하여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확립시키게 됩니다.


 

 3. 정치 체제 정비
 
 - 또한 정도전, 조준을 중심으로 재상 중심의 체제가 확립되면서 국가의 정책을 도평의사사에서 결정하게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도평의사사(=도당)는 태종 이후에 기구가 사라지게 됩니다.

 - 정도전은 재상중심의 정치를 강조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국정에서의 왕권이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02. 정종 (1398-1400)


 

 고려왕조도 그랬듯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태조가 있은 후의 왕권은 다소 불안정한 편입니다. 정종 역시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 이방원(=태종)의 영향력 아래에서 즉위한 정종은 한양에서 개경으로 천도합니다. 
 

사실 정종은 재위기간이 긴편은 아니기 때문에 큼직한 사건은 없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사실이 바로 관제의 개혁이라 할 수 있는데요. 주요 관제 개혁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도평의사사를 축소와 의정부의 설치

    - 고려시대 기구였던 중추원을 삼군부로 개편합니다.

 

  2) 집현전 설치

   - 고려를 본따 유학과 정책 연구 기구로서 집현전을 설치합니다.
 

 

 

03. 태종 (이방원) (1400-1418)


 

 태종 이방원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형제들과 개국공신을 숙청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 중심으로 국가를 경영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종은 아래와 같은 일을 진행합니다.

 - 도평의사사 폐지, 6조 직계제 실시

 - 정종 대 설치되었던 의정부 정비, But 실권없음 (후에 세종 대 역할강화)

 - 왕권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간원 독립

 - 왕실 외척 및 종친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

   (후에 종친과 외척은 세조 대 영향력이 강화됩니다)

 
 

 이러한 태종은 대체로 왕권 강화를 위해 의금부와 승정원을 설치합니다.

 
 

 ##국가 기반 확립##을 위한 태종의 여러 정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억불 정책

   - 사원 경제를 정비하여 전국 242개의 사원을 제외한 나머지 사원의 토지와 노비 몰수

  2) 국가 재정분야

   *양전 사업 : (매 20년마다) 전국 토지 측량,

   *호구 파악 : 가호의 수와 장정이 수를 책정하여 호적 작성

  3) 호패법  :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지급

  4) 기타 정책

   - 공도 정책

   - 두만강 국경 지역(경성, 경원)에 무역소 설치

   - 노비변정도감 설치

   - 사원, 관청 및 개인의 노비를 조사하여 억울하게 노비된 자 수십만 명 해방 
   - 신문고 설치
   초기에는 국왕의 직속 기관인 의금부에서 신문고를 주관함

 -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가 영조 대에 다시 부활 (영조 대는 병조에서 관할)


  - 한품서용제와 서얼금고법

  - 재가금지법

 
 

 ##태종의 문화##

  1) 활자의 주조 : 주자소를 설치, 구리로 만든 동활자로 '계미자' 주조

  2) 저화의 발행 : 사섬서(공양왕 대  지폐 '저화'를 재발행)

  3) 법전의 편찬 : 원육전, 속육전(하륜) 법전을 간행하여 전국 반포

  4) 이회와 이무에게 혼일강리역대국지도를 제작시킴(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
 

 

 

네, 이상으로 오늘은 태정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세문단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참고 : 신영식 해동한국사, 네이버 백과사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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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 대해 살펴보려하는데요. 조선시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이성계라는 위인이 있어서 였을수도 있지만, 고려말의 부패한 현실에 대해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 일들은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조선이 등장할 수 있도록 한 신진사대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신진사대부의 성장>

 

 

(1) 성격

- 신진사대부의 성격은 주로 다음과 같겠습니다. 고려 말 과거를 통해 새롭게 중앙 정계에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권문세족의 횡포를 비판하고 고려 사회의 폐단을 개혁하려 했습니다.

 

-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학자적 관리로서, 진취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중소 지주층으로 지방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장하였으며, 향리의 자제들이었으므로 행정 실무에 능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 신진사대부들의 성장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권문세족을 비판하며 개혁을 추진하던 신진사대부들은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하였고,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과 정치적 협력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진사대부들은 그 내부에서도 고려의 개혁방향을 놓고 나뉘게 되는데요. 고려 말 공민왕의 개혁이 원의 압력과 권문세족의 반발로 인해 실패한 후,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신진사대부는 혁명파와 온건파로 분화되게 됩니다. 이들의 갈등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놓고 대단히 갈등이 첨예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신진사대부를 둘로 나눈 그 성격을 하나씩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온건파 신진사대부입니다. 이들은 비리의 핵심 세력을 제거하고 권문세족의 대토지 사유는 정리는 하는 데 동의하지만, 고려왕조 자체를 파과하거나 전면적인 토지 개혁에는 반대했다는 데 큰 주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둘째, 급진파 신진사대부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대해서 즉각 찬성하고 권세가들에 의한토지 사유를 축소시키려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들의 주장은 새로운 나라를 만드려면, 새로운 경제제도에서 기존 기득권 세력들의 힘을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그렇게 갈등이 첨예하게 만들도록 했던 그 사건, '위화도 회군'은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위화도 회군은 배경부터 설명하면 깁니다. 명나라는 공민왕 때 수복한 철령 이북의 땅이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을 해오게 되지요. 이것은 고려에 적잖은 충격을 주게 되고, 이에 대해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대해 최영 장군 즉각적인 출병을 통해 요동을 칠 것을 주장하지만, 반면에 이성계는 4불가론을 제시하며 출병에 반대합니다.

 

 

이러한 양립되는 견해 속에서 고려 조정은 최영 장군의 주장대로 요동 정벌을 단행합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개경으로 돌리게 되고, 결국 최영 장군과 권문세족들을 없애고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를 위화도 회군 사건이라 합니다.

 

 

이 위화도 회군을 결과로 이성계와 결탁한 급진파 신진사대부의 정치기반으로 자리잡게 되어 새로운 나라 조선에 대한 개혁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급진 신진사대부들은 새롭게 정권을 잡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기 전에 먼저 경제제도를 만들게 되는데요. 그것이 바로 과전법입니다. 

 

 

과전법 공포(1391)

 

 #배경

 - 권문세족의 불법적 토지 겸병으로 인해 면세전(대농장)이 확대되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이 나게 되어 관료의 녹봉마저 제대로 지급되지 못한 상황에 대해 개혁을 하게 됩니다.

 

 #과전법 시행 과정

 -  정도전 등의 신진사대부는 공사 토지 문서를 모두 불사르고, 새로운 양안을 작성한 후,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다시 조정하게 됩니다.

 

  #결과

 - 새로운 조세제도를 통해 기존의 권문세족들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로 인해 농민들에 대한 피해를 복구하고, 새로운 관료들을 위한 봉급 체계를 만들게 됩니다.

 

 - 이러한 경제 제도 개혁의 성공과 더불어 1392년 7월 16일에는 결국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되어 결국 조선이 건국되게 됩니다.

 

 

 

네, 이것으로 오늘은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신진사대부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후 조선의 내용에 대해서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참고 : 신영식 해동한국사, 네이버 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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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오늘은 오랜만에 고려의 문화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려 합니다.

그 중에서도 역법과 자기에 대해서 서술하려 합니다.

 

 

1. 고려자기 변천과정  

  

 ㄱ. 순수비색청자(11세기)-순비청

   송나라의 '서긍'은 순수비색청자의 아름다움을 '고려도경'에 남김 <-- 이 내용으로도 어떤 자기에 대한 내용인지 이해해야하며, 당시가 몇 세기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ㄴ. 상감청자(12세기) 

 - 상감기법은 나전수법에서 시작되었지만, 원 간섭기 이후 퇴조됩니다. 하지만 이런 상감청자 기법은 나전 칠기, 은입사 공예에서 응용됩니다.

 - 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방법으로 무늬 를 훨씬 다양하고 화려하게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염

 - ★도요지 : = 전라도 강진과 부안이 유명!!

 - 원 간섭기 이후 북방 가마 기술의 도입으로 청자의 색이 퇴조하면서 조잡해지면서 이후 분청사기가 제작됩니다.

 

 

2. 고려 자기의 발달 과정

  ㄱ.10C

  초기 도자기 형태로써, 그 특징은 유약을 입혀서 구운 초기 형태의 도자기 제작됩니다. 이는 북송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ㄴ.11C

  순수 비색 청자로써, 앞서 봤던 서긍이 극찬하였고, 고려도경에 소개됩니다. 양각, 음각 청자의 제작이라는 특징도 갖습니다.

 

 ㄷ.12C 중엽

  상감청자로써, 독창적인 상감기법이 완성됩니다.

 

 ㄹ.13C 전반

  청자진사채로써, 상감청자를 비롯해 다양한 청자 생산되며, 1231년 몽고의 침입을 받아 상감청자의 쇠퇴 시작되고, 새로운 장식기법이 나타납니다.

 

 ㅁ.13C 중반 이후

  북방 가마 기술의 도입으로 청자의 뚜렷한 퇴조가 나타나며 이는 결국 분청사기로 계승됩니다.

 

 

 

이상으로 고려시대의 자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바로 다음에는 고려시대의 글씨와 그림에 대해 알아보려합니다.

고려의 글씨는 전기와 후기(원 간섭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요.

 

 ㄱ. 고려 전기의 글씨

   - 구양순체 : 굳세고 힘센 글씨체

   - 장단설

   - 신품 4현(탄연, 유신, 최우, 김생)

 

 ㄴ. 고려 후기(원간섭기)의 글씨

   - 조맹부의 송설체(조선으로 계승) : 유려한 글씨  

   - 이암, 이제현

 

 

고려시대의 그림 역시 전기와 후기로 나눠 설명한다면,

 

 ㄱ. 고려 전기의 그림

   - 인종 대 이령의 '예성강도'

   - 송나라 휘종이 감탄

 

 ㄴ. 고려 후기의 그림

   - 문인화와 불화 유행

    - ex) 이제현의 '기마도강도'(실경산수화),  공민왕의 '천산대렵도'

    - 원대 북화가 영향을 준 결과라 할 수 있음

    - 불화의 유행

    - ex) 혜허의 '양류관음도', 서구방의 '수월관음도', 김우문의 '수월관음도' : 작가는 다르지만 작품명은 같습니다.

 

네, 이상으로 오늘의 고려시대 문화에 대해서는 글씨체와 그림 그리고 자기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참고 : 신영식 해동한국사, 네이버 백과사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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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 서른한번째 시간입니다. 이번에도 어떤 표현을 소개할 지에 대해서 고민했는데요. 이번에 도입하는 상황은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의 나이대를 모르지만, 일요일마다 KBS에서 진행되었던 개그콘서트를 아시나요? 지금도 방영중입니다만, 해당 방송에서 "무를 주세요!" 하면서 무를 갈았던 그 코너를 기억하시나요? 오늘은 그 방송에서처럼 무엇인가를 찢어버리곤 할 때 사용되곤 하는 "갈가리 찢다" 와 "갈갈이 찢다" 중에서 어떤 것이 올바른 표현인지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여러분들은 "갈가리 찢다" 와 "갈갈이 찢다" 라는 표현 중에서 어떤 것이 올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발음하기에 보통 편하다고 느낄 수 있는 갈가리 찢다라고 흔히들 생각하고 있진 않았나요? 아니면 갈갈이 찢다가 올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해오시진 않으셨나요? 과연 어떤 것이 올바른 표현일까요? 하단에 정답이 나옵니다.

 

 

 

 


정답은 바로 '갈가리 찢다' 입니다. 먼저 갈가리 찢다의 정확한 뜻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갈가리 [발음 : 갈:가리]

부사


‘가리가리(여러 가닥으로 갈라지거나 찢어진 모양)’의 준말.
그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갈가리 찢어 휴지통에 넣었다.
옷은 개의 발톱으로 갈가리 찢겨 있었고…. (출처 : 최인호, 지구인)
밤의 대기가 별안간 쌍방 간의 총성으로 갈가리 찢기기 시작했다. (출처 : 조해일, 왕십리)

 

 


이러한 해설의 내용을 보니 어떠신가요. 어떤 때에는 발음이 편한 것이 정답이라 생각했지만 비표준어였고, 이번에는 발음이 용이한대로 '갈가리'가 표준어이니 희한한 노릇이네요. 수험 국어에서는 우리의 일반적인 발음의 편의성대로 대중이 정한 하나의 규칙이라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규칙으로서의 표준어 규정대로 무엇이 올바른 표현인지에 대해 반드시 기억해두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갈갈이라는 것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갈-갈이1[발음 : 갈ː가리] 
파생어 : 갈갈이하다 
명사
<농업>  ‘가을갈이(다음 해의 농사에 대비하여, 가을에 논밭을 미리 갈아 두는 일)’의 준말.

네, 갈갈이는 농업에서 사용되는 가을갈이의 준말이라고 하네요. 결국 무엇인가를 찢거나 하는 등에 사용되는 표현은 '갈가리'가 올바르다는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는건 어떨까요? 상황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종이 등을 북북 찢어버리는 상황입니다. 그런 경우에 찢어진 종이들은 마치 가위로 세밀하게 자른듯이 잘라져있겠죠? 생각을 이런식으로 해보면 도움이 될 듯 하다는 것입니다. 갈가리 ---> 가위로 갈가리 찢어버렸다. ---> 가위:가리

 

 

네, 이렇게 오늘의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 서른한번째 주제로는 '갈가리'와 '갈갈이'의 차이에 대해서 학습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향후에는 헷갈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이번 콘텐츠의 내용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참고 : 국립국어원,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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